세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선순위보다 흐름으로 일하기
세상은 내가 A를 다 끝낼 때까지 B를 멈춰놓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난번에 여기까지 읽었어요 ·

얼마 전,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변화와 혁신을 위한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빠르게 변하는 환경을 읽고,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고, 기존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 여기까지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그 뒤에 부연 설명처럼 한 문장이 따라왔다.
물론 기본적인 것, 우리가 원래 해야 하는 레거시 업무들은 우선적으로 잘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문장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당연히 지금 해야 하는 일은 해야 하고,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운영을 내팽개치고 새로운 것만 쫓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지금 해야 할 일을 먼저 잘 끝내고, 여유가 생기면 새로운 변화를 살펴보고, 그다음 혁신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과연 지금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특히 AI처럼 몇 달 사이에도 기술과 일하는 방식 자체가 바뀌는 환경에서는 더 그렇다.
“살을 빼려면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체중 감량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운동 몇 번 더 한다고 삶이 바뀌지는 않는다. 먹는 것, 자는 것, 움직이는 것, 생활 리듬, 환경, 습관까지 삶의 시스템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체중 감량은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변화와 혁신도 비슷하지 않을까. 기존의 일을 먼저 하고, 그다음 혁신을 한다는 생각 자체가 어쩌면 우리가 바꾸어야 할 대상일지도 모른다.
순서가 아니라 흐름
우리는 일을 순서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A를 먼저 하고, A를 끝내면 B를 하고, 그다음에 새로운 변화에 대응한다. 계획을 세우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중요한 것부터 하나씩 끝내는 방식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는 상당히 합리적인 방법이다.
문제는 세상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A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고객은 변하고, 경쟁자는 움직이고, 기술은 발전하고, 조직의 상황도 달라진다. 새로운 문제가 생기고 새로운 가능성도 열린다. 세상은 내가 A를 다 끝낼 때까지 B를 멈춰놓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을 바라보는 방식 역시 조금 달라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순서가 아니라 흐름이다.
프로젝트 사고에서 흐름 사고로
예를 들어 지금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일, AI를 현재 업무에 적용하는 일, 새로운 기술을 탐색하는 일, 미래를 위해 학습하는 일이 있다고 해보자. 기존의 사고라면 지금의 성과를 충분히 낸 다음 AI를 적용하고, 그것이 안정된 다음 새로운 기술을 탐색하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네 가지가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어느 하나가 끝난 뒤 다음 것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속도로 계속 움직이는 여러 개의 흐름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일은 프로젝트의 연속이라기보다 하나의 포트폴리오처럼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방식이 계획을 세우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차례로 실행해서 완료하는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여러 흐름을 동시에 실행하면서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고, 피드백을 받아 자원을 다시 배분하는 쪽에 가깝다. 나는 이것을 프로젝트 사고에서 흐름 사고로의 전환이라고 생각해보고 있다.
포트폴리오는 병렬로, 주의력은 직렬로
그렇다고 “모든 것을 동시에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굉장히 큰 문제가 하나 생긴다. 산만함이다. 세상이 병렬적으로 움직인다고 해서 나 역시 모든 일을 동시에 처리하려 하면 금세 무너진다.
자료 하나를 만들다가 다른 프로젝트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확인한다. 메일을 보다가 새로운 AI 도구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회의 자료를 정리하다가 문득 며칠 전 부탁했던 일이 떠올라 메신저를 열어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한다. “내가 방금 뭘 하고 있었지?” 병렬적인 환경에 대응하려다가 정작 아무것에도 깊게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필요하다. 병렬적으로 사고하는 것과 동시에 여러 일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관리하는 일과 가능성의 포트폴리오는 여러 개의 흐름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내가 쓰는 주의력은 하나의 일에 모아야 한다. 세상은 병렬적으로 움직이지만 인간의 주의력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Portfolio는 병렬로, Attention은 직렬로.
우선순위는 자원의 배분이다
여기에서 우선순위라는 개념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다. 우리는 우선순위를 흔히 “무엇부터 할 것인가?“로 이해한다. 하지만 여러 흐름이 동시에 존재하는 환경이라면 더 중요한 질문은 “지금 이 순간 어느 흐름에 얼마만큼의 주의력과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다. 우선순위가 일의 순서를 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원의 배분 문제가 된다.
어떤 흐름에는 지금 주의력의 60퍼센트를 쓰고, 다른 흐름에는 20퍼센트를 쓴다. 나머지는 작게라도 계속 유지하거나, 잠시 보류한다. 환경이 달라지면 다시 배분한다. 중요한 것은 모든 흐름을 똑같이 대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흐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주의력 방화벽
다만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또 하나의 유혹이 생긴다. 세상의 변화를 잘 감지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새로운 신호가 들어올 때마다 반응하게 된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확인한다. 새로운 요청이 들어오면 바로 움직인다. 다른 프로젝트에 변화가 생기면 하던 일을 멈추고 들여다본다. 하지만 신호를 감지하는 것과 그 신호를 따라 곧바로 움직이는 것은 다른 일이다. 변화가 빠른 환경에서 필요한 것은 변화에 더 빨리 반응하는 능력이 아니라, 어떤 변화에 지금 반응해야 하는지를 선택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개인에게는 일종의 주의력 방화벽이 필요하다. 새로운 신호가 들어왔을 때 곧바로 현재의 작업을 끊는 대신, 일단 감지하고 포착해 두었다가 보류하고, 판단한 뒤 필요하면 편입하는 작은 완충지대를 두는 것이다. “이것을 지금 해야 하는가?” “아니면 나중에 판단해도 되는가?” “이 변화가 내가 관리하고 있는 흐름의 자원 배분을 바꿀 만큼 중요한가?” 이 질문들을 통과한 것만 지금의 실행에 영향을 주게 한다.
변화 속에서 계속 살아 있게 만들 것
처음의 그 문장으로 돌아가 본다. “우리가 원래 해야 하는 레거시 업무들은 우선적으로 잘해야 하지만…” 그 말이 틀려서 위화감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 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원래 해야 하는 일을 먼저 끝내고 나서 변화를 보겠다는 순서 자체가, 세상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빼놓고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앞으로 일을 잘한다는 것의 의미도 조금 달라진다. 많은 일을 동시에 하는 사람도, 모든 변화를 즉시 쫓아가는 사람도 아니다. 여러 흐름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지만 지금 필요한 하나에는 깊게 집중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변화가 생기면 무작정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흐름을 보고 자신의 주의력과 자원을 다시 배분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단순한 ‘우선순위’가 아니라,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무엇을 계속 살아 있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이다.